[영화정보]
개봉 : 2000.10.21.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만옥, 양조위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영화 제목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한 때’라는 뜻을 가진다.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된 첸부인과 차우라는 한 남자가 있다.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이 분륜 관계임을 눈치 챈다. 그들의 관계의 시작이 궁금하던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게 되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 노력해 보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당대 톱스타였던 양조위와 장만옥을 캐스팅해 중년의 남녀의 완숙한 사랑을 진중한 스토리에 녹여 왕가위 특유의 색채로 담아냈다. 단연 왕가위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왕가위 감독이 만들어낸 완벽한 미장센과 OST
이 영화의 미장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카메라에 담는 그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고혹적이고 감각적인 연출력은 화양연화에서 그 방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배우의 연기나 대사가 아닌 화면의 색감, 채도, 공간의 분위기 그 자체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엄청나다. 카메라 워킹이나 구도가 굉장히 절제된 형태로 구현된 영화이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대표되는 현란한 화면 편집이나 감각적인 화면 구성 대신 느린 템포의 정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서 뻔한 멜로드라마의 장면들을 진부하지 않게 담아냈으며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여 놓았다.
왕가위 감독하면 OST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장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음악을 선정하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심지어 그의 영화 중에는 영화보다 음악이 더 알려진 작품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냇 킹 콜의 노래 세 곡이 삽입되었다. 극 중 식사 장면에 사용된 ‘Aquellos Ojos Verdes’와 ‘Te Qiero Dijiste’와 후반부에 삽입된 Quizas, Quizas, Quizas가 있다. Quizas, Quizas, Quizas는 이후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여러 CF에 삽입되곤 했다.
영화 속 비하인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화양연화는 화양적연화에서 유래한 말로, 중국의 7대 가수로 꼽히던 저우쉬안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 중간에 실제 이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있는 노래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혼란기에 빠진 시절에 조국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애국가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양조위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상실적과는 별개로 역대 최고의 영화, 21세기 두 번째로 위대한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삭제 장면이 많은 영화라고도 한다. 양조위와 장만옥의 배드신이 있었는데 영화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감독의 생각 때문에 삭제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감독의 판단이 정확히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배드신이 등장했다면 영화가 주는 그들의 애틋함과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반감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삭제신이 영화에 모두 포함이 됐다면 상영시간이 3시간에 달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명대사로 본 리뷰
"미리 이별 연습을 해 봅시다", "울지 말아요 연습인데"
차우는 그녀에게 이별을 연습해 볼 것을 제안한다. 연습이라고 하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강렬해질수록 연습조차 쉽지 않다.
"우린 그들과 다르다 생각했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어요. 이젠 알 것 같아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죠"
"모르죠? 옛날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에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곤 진흙으로 봉했다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차우는 천녀의 사원 앙코르 와트를 여행하다 작은 구명 하나를 발견하곤 구멍 앞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의 비밀을 묻고 돌아선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이 짧은 주인공의 나래이션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지막 대사여서 그런지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그들은 과연 사랑일까 연민일까 동정일까
영화의 스토리는 지극히 매우 단순하다. 각자의 배우자들의 불륜 사실을 알고 왜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들의 부재를 틈타 서로 역할극을 해보다 그들도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가 사실상 스토리의 전부이다. 하지만 영화가 왜 21세기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지는 영화의 감각적인 스타일에 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와 색감은 우리에게 깊게 각인되기에 충분하다. 배신감, 상실감, 이루어질 수 없는 위태로운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쓸쓸하지만 매혹적이다. 아직도 이 영화의 OST이자 테마곡인 Yumeji’s Theme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올 때면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리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이 자동 플레이된다. 이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화양연화가 주는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느 느낌을 분명 알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사랑이든 연민이든 동정이든 관객은 그저 그들의 손짓, 발걸음 하나 하나에 집중하게 될 뿐이다.